Seon

이야기

사찰 이야기와 선의 가르침

사찰을 걷다 보면 건물과 탑 하나하나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페이지는 사찰 이야기 20편과 선(禪)의 가르침 7편을 모았습니다.

각 글 아래에 근거로 삼은 출처를 함께 적었습니다. 이야기 위의 사찰 이름을 누르면 그 사찰의 방문 안내로 갑니다.

사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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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이야기 · 편집 요약, 직접 인용 아님

다른 종교의 법당에서 온 대웅전

조계사 대웅전 내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계사 대웅전」·「조계사」·「보천교」

조계사 대웅전은 신종교 보천교가 정읍에 세운 십일전을 1937년에 사들여 서울로 옮겨 지은 건물입니다.

1935년 전국 본산 주지들은 조선 불교를 대표할 총본산을 세우면서, 일본식 건물이던 각황사와 달리 중심 법당은 '순 조선식'으로 짓기로 했습니다. 1937년 3월 총본산건설위원회는 신종교 보천교가 정읍에 세운 십일전을 옮겨 짓기로 결정했는데, 이 건물은 전통 양식을 갖추면서도 일제의 신사에 뒤지지 않는 규모였습니다. 일제의 탄압 속에 보천교가 해산되자, 불교계는 그해 봄 이 건물을 사들여 해체하고 부재를 서울로 옮겼습니다. 크게 바꾸지 않고 다시 세운 법당은 1938년 10월 25일 낙성 봉불식을 열었고, 절은 태고사라는 이름을 거쳐 1962년 조계사가 되었습니다. 대웅전 앞에서는 옮겨 지을 때 기둥 밑에 받친 높은 주춧돌을 살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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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이야기 · 원전 인용

병중에 쓴 현판

김정희(추사)

봉은사 판전 현판의 낙관 (1856)

七十一果病中作 — 일흔한 살 과(果)가 병중에 쓰다.

1856년, 일흔한 살의 추사 김정희는 봉은사 판전에 걸 현판 '板殿' 두 글자를 썼습니다. 판전은 그해 새긴 《화엄경》 목판을 비롯한 여러 경판을 보관하는 건물로, 이 현판은 화엄경판의 완성을 기리려 쓴 것으로 여겨집니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과천과 봉은사를 오가며 지내던 그는 글씨를 '七十一果病中作', 곧 일흔한 살의 과(果)가 병중에 썼다는 낙관으로 마무리했는데, '과'는 노년의 별호를 줄인 것입니다. 김정희는 그해 세상을 떠났는데, 이 현판은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에 쓴 것이라고 전합니다. 꾸밈없이 어리숙해 보이는 이 필치를 흔히 '동자체'라고 부릅니다. 판전 앞에서 소박한 두 글자와 병중의 낙관을 찾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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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이야기 · 편집 요약, 직접 인용 아님

불단 뒤 벽에서 나온 태극기

진관사 독립운동 유물 발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진관사 소장 독립신문류」·「북한산 진관사」,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서울 진관사 태극기」

2009년 진관사의 한 전각을 고치던 중, 불단 안쪽 벽에 붙은 봉지에서 태극기에 싸인 1919년의 독립운동 신문 뭉치가 나왔습니다.

2009년 5월, 진관사의 한 전각을 해체·보수하던 중 불단 안쪽 벽에 붙어 있던 커다란 한지 봉지가 발견되었습니다. 봉지 안에는 태극기를 보자기 삼아 싼 신문 뭉치가 있었는데, 상하이판 《독립신문》 등 1919년 6월부터 12월 사이에 나온 신문과 문건 19점이었습니다. 태극기는 일장기 위에 먹으로 태극과 4괘를 덧그린 것이었습니다. 끝자락이 불에 타고 여러 곳에 구멍이 나 있어 만세운동 당시나 그 뒤 현장에서 쓰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며, 학계는 이것을 숨긴 이를 진관사 승려 백초월이나 그와 가까운 승려로 추정합니다. 경내를 걸으며, 이 절의 한 전각 벽이 수십 년 동안 이 비밀을 지켜 왔다는 것을 떠올려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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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이야기 · 전승

바다에서 건진 부처

용궁사 이름 전승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백운산 용궁사」, 인천광역시 인천설화 「바다에서 건진 용궁사의 돌부처」

1860년 무렵 여단포에 사는 어부 윤(尹)씨가 작약도 근해에서 옥으로 조성된 불상을 건져 올려 이 절에 봉안했다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전하는 판본에 따르면, 1860년 무렵 여단포의 어부 윤씨가 작약도 근처 바다에서 옥으로 만든 불상을 건져 올려 이 절에 모셨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흥선대원군이 절을 옛터에 옮겨 짓고, 이름을 구담사에서 바닷속 용왕의 궁전을 뜻하는 용궁사로 고쳤다고 합니다. 인천시가 소개하는 설화에서는 어부 손씨가 연평도 조기잡이 그물로 건진 팔뚝만 한 돌부처로 전하며, 그 돌부처는 일제강점기에 약탈당했다고 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이 절에 머물며 아들의 등극을 위해 10년 동안 기도했다고 전합니다. 경내에서 그의 글씨라는 '용궁사' 편액을 찾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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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이야기 · 전승

추녀를 떠받친 여인상

전등사 대웅전 도편수 설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족산 전등사」

도편수는 울분을 참을 길이 없어 그 여자를 본뜬 형상을 나체로 만들어 추녀를 들고 있게 하였다.

광해군 때 전등사 대웅전 공사를 맡은 도편수는 절 아랫마을의 주모에게 돈과 살림살이를 맡겨 두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공사가 끝나 갈 무렵 주모는 그것을 가지고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분을 참지 못한 도편수는 그 여인을 본뜬 벌거벗은 형상을 만들어 추녀를 떠받치게 했다고 전합니다. 불경 소리를 들으며 잘못을 뉘우치게 하고, 모든 사람이 보고 경계로 삼게 하려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대웅전 네 귀퉁이 기둥 위를 올려다보며, 여인상이라고 하는 형상들이 추녀의 무게를 받치고 있는 모습을 찾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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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이야기 · 전승

하늘에서 내려온 금빛 물고기

범어사·금정산 이름 전승

《신증동국여지승람》 동래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금정산 범어사」 인용), 국가유산청 「금정산 금샘」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한 마리의 금빛 물고기가 오색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 하여 이렇게 그 산을 이름 지었고, 절을 짓고 범어사(梵魚寺)라 불렀다.

옛 지리지는 금정산 산마루의 높은 바위 위에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황금빛을 띠는 샘이 있다고 적었습니다. 금빛 물고기 한 마리가 오색구름을 타고 내려와 그 샘에서 놀았다고 전합니다. 그래서 산 이름을 '금 우물'이라는 뜻의 금정(金井)이라 하고, 그 아래 지은 절을 물고기 어(魚) 자가 든 범어사(梵魚寺)라 불렀다고 합니다. 물고기가 내려온 곳을 기록과 번역에 따라 '하늘'이라고도, '범천'이라고도 합니다. 이 샘으로 전하는 금샘은 절 안이 아니라, 금정산성 북문에서 고당봉 쪽으로 오르다 고당샘 근처에서 등산로를 조금 벗어난 바위 꼭대기에 있어 따로 산행을 해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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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이야기 · 전승

두 생의 부모를 위한 두 절

일연 《삼국유사》

《삼국유사》 권5 효선 「대성효이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

한 몸으로 두 생의 부모에게 효도하였으니, 옛날에도 드물게 들은 일이다.

신라 모량리의 가난한 아이 대성은 어머니가 품을 팔아 얻은 밭을 법회에 시주하자고 권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고 전합니다. 그날 밤 재상 김문량의 집에 '모량리의 아이 대성이 이제 너의 집에 의탁한다'는 하늘의 외침이 들렸고, 그 집에서 태어난 아이는 꼭 쥔 왼손을 이레 만에 펴 '大城' 두 글자가 새겨진 금 조각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 집에서는 전생의 어머니도 모셔 와 함께 봉양했고, 자라서 사냥을 즐기던 대성은 토함산에서 잡은 곰이 꿈에 나타나 절을 지어 달라고 하자 사냥을 끊었습니다. 일연은 《삼국유사》에 그가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 곧 지금의 석굴암을 세웠다고 적었습니다. 다만 일연은 절에 전하는 기록에는 751년 대성이 불국사를 짓기 시작해 그가 죽은 뒤 나라가 완성했다고 되어 있어 옛 전승과 다르며, 어느 쪽이 옳은지 알 수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불국사를 둘러본 뒤 같은 이야기의 다른 절인 석굴암도 찾아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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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이야기 · 편집 요약, 직접 인용 아님

열두 석굴 가장 높은 곳의 마애불

골굴암 마애여래좌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주 골굴암 마애여래 좌상」,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경주 골굴암 마애여래좌상」, 골굴사 누리집 「골굴사 연혁」

자연 굴을 이용해 만든 열두 석굴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통일신라 후기에 새긴 것으로 보이는 마애불이 있습니다.

경주 기림사 골짜기의 골굴암, 지금의 골굴사에는 자연 굴을 이용해 만든 열두 개의 석굴이 있고, 그 가운데 가장 높은 암벽에 높이 4m의 부처가 새겨져 있습니다. 조선 시대 화첩 《교남명승첩》에 실린 그림 「골굴석굴」에는 이 석굴 앞에 나무로 지은 전실이 그려져 있지만, 지금은 그 건물이 없고 바위 곳곳에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돌의 질이 고르지 않아 무릎 아래는 떨어져 나갔습니다. 가슴과 광배 일부도 상했지만, 얼굴에는 길게 새긴 반쯤 뜬 눈과 입가의 잔잔한 미소가 남아 있습니다. 평면적인 몸과 계단처럼 얇게 겹친 옷주름이 867년에 만든 봉화 축서사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과 닮아, 9세기 후반 통일신라 때 새긴 것으로 추정됩니다. 불상 앞에 서면 바위에 남은 옛 전실의 흔적을 찾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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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이야기 · 전승

아홉 용의 못

통도사 창건 전승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영축산 통도사」, 디지털양산문화대전 「용혈암과 구룡지의 유래」

본래 이 절터에는 큰 못이 있었고 이 못에는 아홉 마리 용이 살고 있었으나 창건주 자장율사가 이들을 제도하고, 한 마리 용을 이곳에 남겨 사찰을 수호하게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통도사를 지으려 할 때, 그 자리에는 아홉 마리 용이 사는 큰 못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양산 지역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율사가 주문과 경을 읽으며 못을 떠나 달라고 해도 용들이 응하지 않자 종이에 불 화(火) 자를 써서 하늘로 날리고 법장으로 못물을 저었고, 그러자 못물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세 마리는 죽고 다섯 마리는 절 남서쪽 골짜기로 달아났으며, 눈먼 마지막 한 마리는 절을 지키겠다고 맹세하며 작은 못 하나를 만들어 달라고 빌었다고 합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자장율사가 용들을 제도하고 한 마리를 남겨 절을 지키게 했다고 적어, 남은 용의 사연은 판본마다 조금 다릅니다. 대웅전 바로 옆, 금강계단 곁에 있는 작은 상징적인 못 구룡신지를 찾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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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이야기 · 전승

신효거사와 학의 깃

일연 《삼국유사》

《삼국유사》 권3 탑상 「대산월정사오류성중(臺山月精寺五類聖衆)」

비구들이 깃을 가사의 빈 폭에 대어 보니 꼭 맞았는데, 그것은 깃이 아니라 천이었다.

월정사에 전하던 옛 기록에 따르면, 공주에 살던 신효는 효성이 지극해 고기가 아니면 먹지 않는 어머니를 위해 고기를 구하러 나섰다가, 길에서 학 다섯 마리를 보고 활을 쏘았고 그중 한 마리가 깃 하나를 떨어뜨리고 날아갔다고 합니다. 그 깃으로 눈을 가리고 사람들을 보니 모두 짐승으로 보였고, 고기를 얻지 못한 그는 자기 넓적다리 살을 베어 어머니께 드렸다고 합니다. 뒤에 집을 떠나 그 집을 절로 내놓은 그는, 길에서 만난 노파의 말을 관음보살의 가르침으로 알아듣고 오대산 기슭에서 자장이 처음 초막을 지었던 자리, 곧 지금의 월정사 자리에 들어가 살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다섯 비구가 찾아와 그가 가져온 가사 한 폭이 어디 있느냐고 묻고는 그가 사람을 보던 그 깃이 바로 그것이라고 했는데, 깃을 가사의 빈 폭에 대어 보니 꼭 맞았고 그것은 깃이 아니라 천이었다고 합니다. 비구들과 헤어진 뒤에야 신효는 그들이 다섯 부류 성중의 화신이었음을 알았다고 합니다. 《삼국유사》는 다섯 부류 성중과 함께 이 절의 구층 석탑도 성스러운 자취로 꼽았지만, 지금 법당 앞뜰에 선 고려 때의 팔각구층석탑이 바로 그 탑인지는 기록이 말해 주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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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이야기 · 전승

관음을 알아보지 못한 원효

일연 《삼국유사》

《삼국유사》 권3 탑상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洛山二大聖 觀音 正趣 調信)」

스님은 성스러운 굴에 들어가 진신의 모습을 다시 뵈려 했으나, 풍랑이 크게 일어 들어가지 못하고 떠났다.

의상이 낙산사를 세운 뒤, 원효도 그 뒤를 이어 관음보살을 뵈려고 이곳을 찾았다고 전합니다. 남쪽 들판의 논에서는 벼를 베던 흰옷 입은 여인에게 장난삼아 벼를 달라고 했다가 벼가 흉작이라는 장난스러운 대답을 들었고, 다리 밑에서는 빨래하던 여인에게 물을 청했다가 그 더러운 물을 받자 쏟아 버리고 다시 물을 떠 마셨다고 합니다. 그때 들판 소나무 위의 파랑새가 그를 부르고는 사라졌는데, 그 소나무 아래에는 벗어 놓은 신 한 짝이 있었다고 합니다. 절에 이르러 관음상 자리 아래에서 앞서 본 것과 같은 신 한 짝을 보고서야, 원효는 길에서 만난 이가 관음의 진신이었음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는 관음이 머문다는 바닷가 굴에 들어가 다시 그 모습을 뵈려 했지만, 풍랑이 크게 일어 들어가지 못하고 떠났다고 합니다. 의상대 북쪽, 바닷가 바위굴 위에 지은 홍련암은 법당 마루 밑으로 출렁이는 바닷물을 볼 수 있게 지어졌으니 들러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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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이야기 · 전승

선묘와 뜬 바위

찬녕 《송고승전》

《송고승전》 권4 「당 신라국 의상전(唐新羅國義湘傳)」

선묘룡이 허공에서 큰 신통을 부려 가로세로 1리나 되는 큰 바위로 변하더니, 가람 위를 덮고 떨어질 듯 말 듯한 모양을 지었다.

찬녕의 《송고승전》에 따르면, 당나라에 건너간 의상이 등주의 한 신도 집에 머물 때 그 집의 젊은 여인 선묘가 그의 마음을 얻으려 했지만, 의상의 마음은 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선묘는 도를 구하는 마음을 내어, 세세생생 스님께 귀의하고 시주가 되어 스님께 필요한 것을 대겠다고 서원했다고 합니다. 여러 해 뒤 의상이 탄 귀국선이 이미 멀어지자 선묘는 그를 위해 마련해 둔 법복과 물건 상자를 바다에 던졌고 상자는 바람에 날려 배에 들어갔으며, 이어 선묘는 큰 용이 되어 배를 지키겠다고 서원하며 바다에 몸을 던졌다고 합니다. 신라로 돌아온 의상이 화엄을 펼 땅을 찾았을 때 그곳에는 다른 종파의 승려 500명가량이 모여 있었다고 합니다. 늘 그를 따르며 지키던 선묘룡이 큰 바위로 변해 가람 위에 떨어질 듯 떠 있자 승려들이 놀라 흩어졌고, 의상은 그곳에서 《화엄경》을 펼쳤다고 합니다. 찬녕은 절 이름을 적지 않았지만 이 이야기는 '뜬 바위'라는 뜻의 부석사(浮石寺) 이름의 유래로 전해 오니, 선묘룡이 변했던 바로 그 바위라고 전하는 무량수전 뒤의 바위 부석과 선묘의 영정을 모신 선묘각을 찾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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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이야기 · 전승

벼슬을 받은 소나무

정이품송 전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보은 속리 정이품송」·「속리산 법주사」,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보은 속리 정이품송」

이에 세조가 “가마가 걸린다”고 말하니 소나무가 자신의 가지를 위로 들어 왕이 무사히 지나가도록 하였다 한다.

1464년 세조가 법주사로 행차할 때, 임금이 탄 가마가 아래로 처진 이 소나무 가지에 걸리게 되자 세조가 '가마가 걸린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소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위로 들어 올려 가마가 무사히 지나가게 했고, 세조는 이 소나무에 지금의 장관급에 해당하는 정이품 벼슬을 내렸다고 전합니다. 그래서 정이품송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세조가 이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했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합니다. 소나무 앞마을의 이름 진허(陣墟)도 그때 세조를 따르던 군사들이 진을 치고 머물렀다는 데서 왔다고 합니다. 삿갓이나 우산을 편 듯 단정하던 이 소나무는 1993년 강풍에 서쪽 큰 가지가 부러져 모습이 많이 상했습니다. 정이품송은 법주사에 이르기 전, 절로 들어가는 길에 서 있으니 오가는 길에 찾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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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이야기 · 전승

흰 양이 모여든 절

백양사 이름 전승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백암산 백양사」·「백양산」

1574년(선조 7) 환양(喚羊)이 주석하면서 매일 『법화경』을 독송하니 흰 양들이 경을 읽는 소리를 듣고 몰려오는 일이 많아 절 이름을 ‘백양사’라 개칭하고 자신의 법명도 ‘환양’이라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환양 스님이 이 절에 머물며 날마다 《법화경》을 읽자, 경 읽는 소리를 듣고 흰 양들이 자주 몰려왔다고 전합니다. 그래서 절 이름을 흰 양의 절, 백양사(白羊寺)로 고치고, 스님도 양(羊) 자가 든 환양(喚羊)을 법명으로 삼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전설에서는 스님이 대웅전에서 《법화경》을 설법하자 산양들이 산에서 내려와 들었다고 하여, 이야기의 세부는 전하는 곳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이야기는 이 일을 1574년의 일로 전하지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19세기 중반까지는 백암사와 정토사라는 이름이 계속 쓰였고, '백양사'가 하나로 통일된 이름으로 쓰인 것은 19세기 후반부터입니다. 옛 이름 백암사(白巖寺)의 '백암'은 흰 바위라는 뜻으로, 조선 왕조의 정치적 설계자 정도전은 이 산의 바위가 모두 희어 백암이라 불렀다고 기록했습니다. 절 뒤의 흰 바위 봉우리 백학봉을 올려다보며, 흰 바위와 흰 양이라는 두 이름을 함께 떠올려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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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이야기 · 편집 요약, 직접 인용 아님

'공상'이라 불린 계획

약천사 창건 내력

약천사 누리집 「연혁활동」

혜인 스님의 3층 대적광전 계획을 많은 이들이 공상으로 여겼지만, 그 큰법당은 1996년 낙성 법회를 열었습니다.

1981년 혜인 스님은 제주에 국제적으로 내놓아도 손색없는 큰 절을 지을 터를 찾다가, 한라산 봉우리가 보이고 앞으로 넓은 바다가 펼쳐진 이 자리를 골랐다고 약천사는 소개합니다. 그때 절터에는 약수암이라 불리던 초가 한 채가 전부였고, 이 자리에는 예부터 약수터가 있었지만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고 들어오는 길도 마땅치 않았습니다. 스님이 웅장한 3층 대적광전의 조감도를 그려 조언을 구하자, 많은 이들은 '그림은 누군들 그렇게 못 그리겠느냐'며 그 계획을 공상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사찰에 따르면 스님은 전국을 다니며 법문하고 받은 사례까지 아껴 땅을 사들였고, 금산사 미륵전처럼 바깥이 3층인 구조에 화엄사 각황전의 웅장한 구조미를 본보기로 삼아 직접 설계 초안을 잡았습니다. 1993년 큰법당에는 사찰이 백두산에서 구해 온 나무로 만들었다고 소개하는 비로자나불 좌상을 모셨고, 1996년에는 낙성 법회를 열었습니다. 큰법당 안에서, 사찰이 국내에서 가장 큰 목조 좌불이라고 소개하는 이 비로자나불을 올려다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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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이야기 · 전승

바다로 헤엄쳐 드는 거북

향일암 지형 전승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금오산 향일암」,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여수 금오산 향일암 일원」

이곳은 해상 일출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곳이며, 그 위치는 거북이 바다 쪽으로 팔을 휘저으며 들어가고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

여수 금오산의 향일암 자리는 거북이 팔을 휘저으며 바다 쪽으로 들어가는 모습이라고 전합니다. 근대에 들어 경봉은 절 뒷산의 바위가 거북의 등처럼 생겼다 하여 이 암자를 '신령한 거북의 암자'라는 뜻의 영구암(靈龜庵)이라 불렀습니다. 지금 이름 향일암(向日庵)은 '해를 향하는 암자'라는 뜻으로, 이곳에서 보는 해 뜨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하여 붙은 이름입니다. 국가유산청은 이 일대를 명승으로 지정했고, 그 설명에서 거북 모양의 지형, 거북 등껍질 무늬가 있는 바위들, 자연 바위로 이루어진 해탈문 같은 돌문이 울창한 동백나무 숲과 어우러진 경관을 꼽습니다. 향일암 일대의 바위에서 거북 등껍질 무늬를 찾아보고, 해탈문 같은 돌문도 지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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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이야기 · 전승

목정굴의 기도와 봉서

금선사 목정굴 전승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삼각산 목정굴」, 금선사 누리집 「기도성지목정굴」·「금선사 설화」

기도가 끝나는 날에 왕실에서는 한 봉서(封書)를 얻었는데, 봉서에는 “경술(1790) 6월 18일 모시 왕세자탄강”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이는 순조의 탄생을 예견한 것이었다.

왕세자가 없어 걱정하던 정조의 부탁으로, 수십 년 동안 산속에서만 수도해 온 농산(聾山) 스님이 이 굴, 목정굴에서 왕자의 탄생을 비는 기도를 올렸다고 전합니다. 기도가 끝나는 날 왕실은 봉서 한 통을 얻었는데, 거기에는 경술년(1790) 6월 18일에 왕세자가 태어난다고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그날이 되자 붉은빛이 감도는 무지개가 서북쪽에서 옮겨 와 산실을 감쌌고, 그 빛의 자취를 좇아가 보니 목정굴 제단 위에 가사를 걸치고 가부좌한 채 이미 입적한 노승의 이마에서 빛이 나오고 있었다고 합니다. 정조는 내수사에 명해 굴 위에 절을 짓게 하고, 김홍도에게 농산의 모습을 그리게 해 공양하게 했다고 전하는데, 금선사는 무학대사가 세웠다는 절을 이때 정조가 크게 중창하게 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야기의 세부는 전하는 곳마다 달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백일기도로, 금선사는 300일 관음기도로 적으며, 농산 스님이 순조로 다시 태어났다는 대목은 금선사에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절 곁의 목정굴에 들러, 이야기가 기도처로 전하는 그 굴을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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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이야기 · 편집 요약, 직접 인용 아님

'궁절'이라 불린 절

화계사 왕실 후원 내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삼각산 화계사」, 화계사 누리집 「가람배치」·「화계사의 역사」·「보화루」

19세기 후반 대비와 상궁들이 자주 드나들어, 사람들은 화계사를 '궁절'이라고 불렀습니다.

1866년 용선·범운 스님은 흥선대원군의 시주를 받아 화계사의 낡은 건물들을 고쳤고, 사찰은 그래서 지금도 전각 곳곳에 대원군이 쓴 현판이 남아 있다고 소개합니다. 이어 조대비가 명부전을 위해 시주하고 대비와 상궁들의 발길이 잦아지자, 사람들은 이 절을 '궁절'이라고 불렀습니다. 사찰은 왕실의 시주로 거듭 고쳐 지었기에 화계사의 가람 배치가 여느 절과 다르다고 설명하며, 그 예로 대웅전 앞에 놓인 큰 건물 보화루를 듭니다. 사찰에 따르면 보화루는 일반 살림집의 이모저모를 갖춰 왕실 가족이 절에 와서 편히 쓸 수 있게 배려한 건물이고, 마루에서 대웅전을 바라보면 불상이 보여 마루에서 바로 예불을 드릴 수 있도록 지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찰은 이런 건물이 서울 근교의 왕실 사찰에서 주로 보이며 보통 '큰방'이라는 뜻의 대방(大房)이라 한다고 덧붙이는데, 보화루는 지금 요사와 종무소, 다실로 쓰입니다. 보화루에 걸린 '화계사' 현판 가운데 하나는 1866년 대방을 고칠 때 흥선대원군이 쓴 것이라 하니, 보화루에서 찾아보세요.

화엄사 방문 안내 →

사찰 이야기 · 전승

어머니에게 차를 올리는 스님

화엄사 효대 전승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화엄사 사사자석탑 앞 석등」

사자들에 에워싸여 있는 중앙에는 합장한 채 서있는 스님상이 있는데 이는 연기조사의 어머니라고 전하며, 바로 앞 석등의 탑을 향해 꿇어앉아 있는 스님상은 석등을 이고 어머니께 차를 공양하는 연기조사의 지극한 효성을 표현해 놓은 것이라 한다.

화엄사 중심에서 서북쪽,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높은 터는 '효대(孝臺)'라고 불리며, 그 위에 네 마리 돌사자가 받친 삼층석탑과 석등이 마주 서 있습니다. 탑 위층 기단의 네 사자 사이에는 합장하고 선 스님 모습의 상이 있는데, 화엄사를 세웠다고 하는 연기조사의 어머니라고 전합니다. 탑 바로 앞 석등에는 기둥 대신 한쪽 무릎을 꿇은 스님상이 탑을 향해 앉아 석등을 이고 있는데, 어머니께 차를 올리는 연기조사의 지극한 효성을 나타낸 것이라 합니다. 다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탑 가운데의 상을 합장한 고승(대덕)의 입상으로 설명하며, 탑은 8세기 중엽, 석등은 9세기 후반에 만든 것으로 추정합니다. 효대에 올라 석등의 스님상이 탑을 향해 앉은 모습을 살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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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이야기 · 편집 요약, 직접 인용 아님

주춧돌의 게와 거북

미황사 대웅보전 주춧돌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해남 미황사 대웅전」, 국가유산청 문화재 칼럼 「민초 염원 품은 미황사 거북과 게 초석」(조상순, 국립문화재연구소)

미황사 대웅보전의 주춧돌 몇 개에는 연꽃무늬와 함께 게와 거북이 새겨져 있습니다.

미황사 대웅보전 앞면과 옆면의 주춧돌 몇 개에는 연꽃무늬와 함께 게와 거북이 새겨져 있고, 나머지 주춧돌은 자연석입니다. 2017년 당시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조상순 연구관은 수백 년 바닷바람을 견딘 게의 길쭉한 두 눈이 부처를 모신 법당 안을 향하고, 거북도 예불을 드리듯 두 앞발을 뻗고 있다고 묘사했습니다. 그는 미황사가 바다를 마주하고 이곳 사람들이 예나 지금이나 주로 바다와 관련된 일을 해 왔다는 점에 주목해, 바다에서 풍요를 얻고 거친 바다로부터 가족을 지키려는 서민들의 바람을 불교가 받아들인 것으로 풀이했습니다. 이 풀이는 한 연구자의 견해이며, 국가유산청의 문화유산 설명은 같은 조각을 거북이 아닌 자라로 적습니다. 대웅보전 앞쪽 기둥 밑 주춧돌을 하나하나 살피며 연꽃잎 위에 올라앉은 게와 거북을 찾아보세요.

선의 가르침

가르침 · 전승

원효대사

원효 오도 전승 (《송고승전》 의상전: 무덤에서 묵은 밤 / 《종경록》 이후: 물을 마신 이야기)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가 다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므로 땅굴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알겠구나.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원효는 궂은 날씨를 피해 길옆 토굴에서 밤을 보냈는데, 날이 밝아 보니 해골이 있는 옛 무덤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처음 전하는 《송고승전》에는 물을 마신 대목이 없고, 그다음 밤 무덤에서 귀신에 시달린 끝에 위와 같이 깨달았다고 전합니다. 밤에 마신 물이 다음 날 보니 시신이 썩은 물이었다는 이야기는 그 뒤에 쓰인 《종경록》에 처음 나오며, 널리 알려진 '해골 물' 이야기는 이 후대 전승입니다. 같은 자리가 마음에 따라 편안한 토굴도, 무서운 무덤도 되었다는 이 이야기는 일어난 일과 그 일에 대한 나의 해석을 나누어 보도록 이끕니다.

성찰 질문지금 나를 괴롭히는 상황을 객관적인 사실과 내 해석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까요?

가르침 · 전승

이양연(李亮淵, 1771~1853) · 서산대사 작으로도 널리 알려짐

한시 〈야설(野雪)〉 (이양연 문집 《임연당별집》 수록, 통행본 첫 구 '踏雪野中去')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 마라.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은 뒤따라오는 이의 길이 되리니.

흔히 서산대사의 시로 알려져 있지만, 서산대사의 문집 《청허집》에는 실려 있지 않고 조선 후기 문신 이양연의 문집에 〈야설〉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 시입니다. 문집의 첫 구는 '눈을 뚫고(穿雪)'로, 널리 알려진 '눈을 밟고(踏雪)'와 한 글자가 다릅니다. 위 번역은 널리 알려진 통행본을 옮긴 것입니다. 눈 위의 발자국처럼 우리의 작은 선택과 말도 뒤따르는 누군가에게 길이 될 수 있습니다. 거창한 행동이 아니더라도 일상의 행동이 어떤 본보기를 남기는지 돌아볼 수 있습니다.

성찰 질문오늘 내가 무심코 남긴 말과 행동은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길이 되었을까요?

해동용궁사 방문 안내 →

가르침 · 전승

나옹선사(혜근, 1320~1376) 작으로 전해짐

전승 선시 〈청산은 나를 보고〉 (《나옹화상가송》에서는 확인되지 않음)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 가라 하네.

'청산은 나를 보고'는 고려 말 나옹선사의 선시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나옹의 노래와 게송을 모은 《나옹화상가송》에서는 이 시가 확인되지 않으며 당나라 승려 한산의 시라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위 노랫말은 오늘날 널리 불리는 우리말 노랫말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은 상대를 태우기 전에 내 가슴을 먼저 태웁니다. 사랑과 미움이라는 격정의 옷을 잠시 벗어두고, 물처럼 바람처럼 그냥 지나가게 두어 보세요.

성찰 질문오늘 내 마음에 맺혀 바람처럼 흘려보내지 못한 앙금이 있나요?

가르침 · 원전 인용

보조국사 지눌

《수심결(修心訣)》

부처가 곧 마음이니, 마음을 어찌 멀리서 찾겠는가. 이 몸을 떠나 있지 않다.

많은 이들이 깨달음은 먼 산꼭대기나 신비로운 곳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려의 지눌은 《수심결》에서 부처가 곧 마음이니 멀리서 찾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루 내내 배고픔과 목마름을 알고, 추위와 더위를 알며, 성내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는 그것이 결국 무엇인지 묻습니다. 이 가르침을 오늘의 일상에 옮겨 보면, 밥 먹을 때 밥에, 걸을 때 걸음에 마음을 두는 것도 하나의 연습이 될 수 있습니다.

성찰 질문오늘 식사를 하거나 걸을 때 다른 생각 없이 온전히 그 순간에 머문 적이 있나요?

가르침 · 원전 인용

조주 선사와 엄양 존자의 문답

《오등회원(五燈會元)》 권4 (송대 보제 편) — 방하착(放下着)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을 때는 어찌합니까?」 「내려놓아라.」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무엇을 내려놓습니까?」 「내려놓지 못하겠거든 짊어지고 가거라.」

중국 선종의 조주 선사에게 엄양 존자가 물었습니다.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요. 조주는 '내려놓아라' 하였고, 가져온 것이 없는데 무엇을 내려놓느냐고 다시 묻자 '내려놓지 못하겠거든 짊어지고 가거라' 하였습니다. 엄양은 그 말에 크게 깨달았다고 전합니다. 오늘의 성찰로 읽으면, 우리는 오래된 원망과 상처, 지난 영광을 무거운 돌 자루처럼 지고 다니면서도 이미 다 내려놓았다고 여기곤 합니다. 등의 짐을 내려놓아야 산의 맑은 공기가 가슴에 들어옵니다.

성찰 질문과거의 일 중 아직도 양손에 꼭 쥐고 있는 짐은 무엇인가요?

가르침 · 전승

한국 불교의 전통 비유

처염상정(處染常淨) — 연꽃 비유 (참고: 《법화경》 종지용출품 '不染世間法 如蓮華在水')

더러운 곳에 머물더라도 항상 깨끗함을 잃지 않는다.

세상은 때로 소음과 다툼으로 가득 찬 진흙탕처럼 느껴집니다. 《유마경》은 높은 언덕이나 마른 땅에서는 연꽃이 나지 않고 낮고 습한 진흙에서 이 꽃이 핀다고 말하고, 《법화경》은 세상의 법에 물들지 않는 모습을 물속의 연꽃에 빗댑니다. 처염상정은 더러운 곳에 머물러도 늘 깨끗함을 잃지 않는다는 뜻의 말로, 사찰 연못의 연꽃을 볼 때 떠올려 볼 만합니다. 지금 겪는 어지러운 현실도 당신을 더 깊고 맑게 피워내는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성찰 질문지금 내가 겪는 힘든 환경 속에서 오히려 피워낼 수 있는 내 내면의 아름다움은 무엇일까요?

가르침 · 편집 요약, 직접 인용 아님

편집부 성찰 (템플스테이 차담에서 착안)

스님과의 차담 — 템플스테이 체험 요소 (한국불교문화사업단 templestay.com)

차를 우리고 마시는 일도 마음을 모으는 수행이 될 수 있습니다.

템플스테이에서는 사찰과 프로그램에 따라 스님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차담' 시간이 있습니다. 한국불교문화사업단은 차를 우리고 마시며 마음챙김과 집중을 익히는 다선(茶禪)을 명상의 하나로 소개하고, 차와 선이 하나라는 '다선일미'라는 말도 전합니다. 따뜻한 잔을 두 손으로 감싸고, 찻잎이 봄볕과 여름비를 지나 이 잔에 오기까지의 시간을 천천히 느껴 보세요. 차를 마시는 동안만큼은 어제의 후회와 내일의 걱정을 내려놓고 지금 여기에 머물 수 있습니다.

성찰 질문오늘 따뜻한 물이나 차를 마실 때, 딱 3분간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온전히 그 온기를 느껴볼 수 있을까요?